흉금 털어내던 '빨래터 문화' 실종…무너진 모성본능 


온실서 큰 초보맘 육아는 '고통' 핵가족화로 도움 손길도 없어 산후우울증에 '자포자기' 심정 

스트레스·고립감 해소할 수 있는 육아경험 '대화의 장' 마련 절실 


한 병원 산부인과 신생아실에서 갓 태어난 아기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한경DB 

세 살배기 아들을 둔 경기 일산의 양모씨(38)는 요즘 자신이 갈수록 무서워지고 있다.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아들에 대한 짜증과 학대가 잦아지고 있어서다. 
온갖 방법으로 달래도 뭔가에 홀린 듯 새벽에 한 시간 넘게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장롱에 넣고 문을 닫은 뒤 자신의 귀를 막기 일쑤다. 

가족의 축복 속에 커나가야 할 아들을 대하는 자신의 변해가는 모습에, 낮이면 평화롭게 잠든 아기를 내려다보며 죄의식에 눈물짓는 날이 늘어난다. 

양씨는 남편과 1년 연애기간을 거쳐 2008년 결혼했다. 중학교 교사인 양씨와 회사 동기들 중 승진이 가장 빠른 남편의 결혼은 주위 사람들에겐 부러움과 축복의 대상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던 양씨 부부가 삐걱대기 시작한 건 출산 직후. 외동딸인 양씨는 초보 엄마로서 ‘보통 여성’들이 하는 육아를 견뎌낼 수 없었다. 
친정어머니는 지병이 있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힘들었다. 연로한 시어머니의 도움도 어려웠다. 

주말마저 반납하고 매일 늦게 귀가하는 남편은 가정의 미래를 생각하면 듬직했지만 지금은 갈수록 야속하기만 하다. 
아들의 육아를 혼자 책임진 양씨는 요즘 자신이 어떻게 변할까 두렵기만 하다. 
2년 전 55㎏이던 양씨는 요즘 하루 한 끼 식사도 제대로 못한다. 이 바람에 체중은 15㎏이나 줄었다. 
양씨 스스로 어떤 일을 저지를지 장담하지 못할 지경이다. 이로 인해 그는 두려워하고 괴로워한다. 

양씨의 일만이 아니다. 이처럼 축복과 사랑을 받아야 할 아기들이 엄마 때문에 ‘위기’에 처한 경우가 적지 않다. 상당수는 피지도 못한 채 생명을 잃고 있다. 
2일 경찰청에 따르면 2009년 52건이던 영아유기 사건은 △2010년 69건 △2011년 127건으로 2년 새 두 배 넘게 늘어났다. 대부분 생모에 의해 유기되는 경우다. 

7남매, 8남매의 끼니부터 걱정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가슴으로 길러냈던 우리네 어머니의 끈질긴 모성본능이 사라지는 것인가. 
전문가들의 진단은 나와 있다. 영아 유기 사건은 경제난과 무관심, 미숙한 육아 경험에 이은 현대병, 산후우울증을 겪는 초보맘의 자포자기 선택이라는 설명이다.

 

◆미혼모 이어 중산층에서도 영유아 유기 늘어 


영유아 유기의 심각성은 미성년자들의 원치 않는 임신을 숨기기 위한 생각 없는 선택을 넘어 정상적인 결혼생활 속에서도 빚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지난달 28일 오후 1시50분께 경기 안성시의 한 가정집에서 생후 9개월 된 여아가 숨진 채 발견됐다. 
범인은 32세의 친모 A씨였다. 울면서 보챈다는 이유로 아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한 것.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벌어진 참사였다. 

광주 서구에서도 지난 1월 갓 태어난 여아를 원룸 주차장에 버려 숨지게 한 혐의(영아유기)로 C씨(39)가 붙잡혔다. 
이혼한 뒤 혼자 아이 네 명을 키우던 C씨는 육아에 도움을 줄 사람을 찾기 힘든 데다 생활고까지 겹쳐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신의 아이를 내다버렸다. 

이런 생명 경시 흐름에 법원의 판단은 엄격해지고 있다. B씨(28)는 올 1월 대법원에서 징역 8년의 중형을 확정받았다. 2009년 7월 맡아 기르던 생후 8개월 된 남아를 주먹으로 때려 숨지게 했기 때문이다. 
홀로 자란 B씨가 아기를 낳은 후에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남의 갓난아기 두 명을 돌본 게 화근이었다. 
자신의 아이까지 포함해 세 명의 아기를 돌보던 B씨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에 시달리다 결국 맡긴 아이를 죽인 것. 

형법 제272조에 따르면 직계존속이 영아를 유기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한다. 

영아를 유기해 숨지게 하면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한다. 

같은 법 제251조에 따르면 직계존속이 분만 직후 영아를 살해하면 10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 

 



김홍도 '빨래터' 


◆경험 나눌 ‘동네 빨래터’ 공간 부족 


사회심리학자들은 ‘우물가 빨래터’의 실종을 영유아 유기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대가족사회에서 동네 우물가 빨래터는 며느리들의 스트레스 해소 공간이었다.
동네 아낙들은 이곳에서 빨랫감을 방망이질하며 속에 담긴 화를 털어내고 시모와 남편의 흉을 앞다퉈 보며 감정을 다스렸다. 
서로 힘든 삶 속에서도 이들은 몸을 푼 지 얼마 안 된 새댁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유선(乳線)을 틔워 산모가 초유를 아기에게 먹이기 위해 남편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등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삶의 지혜를 전하고, 시모의 눈치 속에 겪었던 초보 엄마의 신산한 시집살이의 고초를 어루만져준다. 
김홍도의 풍속도 ‘빨래터’에서 현대 초보맘과 바쁜 남편들이 눈여겨 볼 곳은 허벅지를 내놓고 방망이질을 하는 아낙을 훔쳐보는 양반이 아니다. 
빨래터에 어린아기를 데려와 빗질하는 조선시대 초보맘과 아기의 밝은 미소, 힘든 빨래에도 미소를 띤 아낙들의 모습이다. 

황옥경 숙명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도심에서 맞벌이하던 주부가 집안에 들어앉아 홀로 갓난아기를 돌보는 게 중산층 이하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며 
“이들은 단절된 이웃, 육아의 지혜를 배울 형제자매의 부재, 고학력 부모들의 자기고집 등이 어우러져 도심의 무인도에서 홀로 아이를 기르며 만나는 어려움을 혼자 삭이며 병을 키워나가는 꼴”이라고 진단했다. 

◆초보맘 육아 어려움 털어놓을 공간 절실 

어디서도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이 모든 걸 떠안은 고학력 무남독녀의 처음 겪는 육아는 대부분 산후우울증으로 연결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를 방치하면 결국 사랑하는 자녀들이 오랜 시간 방치된 엄마의 산후우울증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처음에는 아이를 책임질 수 없을 것 같다가 이내 ‘나 혼자 죽느니 아이도 데려가자’는 생각이 들 수 있다”며 
“산후우울증이 생기면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나 자살 욕구뿐 아니라 아이 살해 욕구도 함께 생긴다”고 말했다. 
산후우울증이 악화되면서 자살 충동이 심화되고, 더 나아가 아이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꼭 영아 유기·살해로 연결되진 않는다”며 “산후우울증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영아 살해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학계에서는 산모의 성장 배경, 경제적인 여건, 남편과의 관계 등 산후우울증의 원인을 다양하게 진단하지만 가족의 도움 없이 육아 책임을 오롯이 혼자 지게 된 경우 발병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윤지향 씨는 지난해 8월 부산대 간호학과 석사논문 ‘산후우울증 관련 요인’에서 “산후우울증은 산모 중 10~15%가 출산 후 경험하는 우울장애, 산후정신병의 일종”이라며 
“짧게는 2주, 길게는 1년까지 지속되는 심각한 장애로 자신이나 아기가 죽을 것 같은 느낌, 아기를 해치거나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매일 지속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경기 구리시에 사는 주부 C씨는 “출산 직후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아기 얼굴만 봐도 화가 치밀었다”며 “‘내가 나쁜 엄마다. 이러다 말겠지’하면서 지낸 게 벌써 5년째”라고 털어놨다. 
그는 “남편은 출장이 잦아 집에 아이와 둘이 있는 경우가 많다”며 “아이 키우는 일도, 사는 것도 자신이 없어 애랑 같이 죽을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황 교수는 영유아 유기를 막을 대안으로 북유럽 국가에서 정부가 지원하는 ‘패런팅 그룹’의 사례를 들었다. 
그는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가진 부모들끼리 양육 정보를 교환해 아이를 키우는 데 고립감을 느끼지 않고 정보를 공유한다”며 “영유아 유기 사례를 막기 위해서 도입해봄직하다”고 말했다. 

아이에게 아무런 느낌 받지 못하면 산후우울증의 징조…전세계 산모 20% 앓아 

산후우울증은 산모가 출산 후에 겪는 우울장애다. 불안 실망 죄책감을 동반하며 기력이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부부관계에 대한 관심도 줄어진다. 수면장애, 흥분, 집중력 감소도 뒤따른다. 
사회·심리학적 요인으로는 결혼 상태, 사회·경제적인 지위, 자아 존중감, 산전 우울감·불안, 임신 의도, 우울증 병력, 결혼·배우자에 대한 만족도, 양육·생활 스트레스, 영아의 기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생물학적인 요인으로는 출산에 따른 여러 가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 등의 변화가 꼽힌다. 분만 전후의 의학적 상태 변화 및 유전도 요인 중 하나다. 
김병수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산후우울증의 원인은 1차적으로 호르몬 때문”이라며 “에스트로젠 같은 여성호르몬은 출산 직후 확 떨어지는데 이 호르몬은 기분을 조절하고 행복감 기억력 판단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출산 직후 우울해지고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으며 판단력이 흐려지는 이유다. 
김 교수는 “호르몬 변화뿐 아니라 아이를 키울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산모인 경우 부담감이 굉장하다”며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땠는지도 중요한데 친정 어머니가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했을 경우 그 자녀는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크다”고 부연했다. 

산후우울증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한 상태지만 그 실태는 최근에야 대중에 알려졌다. 
캐나다 출신 정신과 전문의인 아리엘 달펜 박사는 2010년 발간한 ‘아기와 함께 찾아온 눈물(when baby brings the blues)’에서 산후우울증에 대한 다양한 속설과 진단법을 소개했다. 
달펜 박사는 “산후우울증과 산후불안장애로 고통받는 여성은 전 세계 산모의 15~2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출처 - 김동민/김선주/심성미 기자 (gmkdm@hankyung.com)>